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공사
장차 일-청 전쟁이 두 번 일어나리니 첫번에는 청국이 패하고 말 것이요, 두 번째 일어나는 싸움이 10년을 가리니 그 끝에 일본은 패하여 쫓겨 들어가리라. (道典 5:301:1∼2)
301: “그 끝에 질병이 들어온다.”는 구절은 이정립이 임의로 삽입한 것이다. 해방 후에 이상호가 여러 간부들 앞에서 종종 동생 정립(호 : 南舟)에게 ‘남주는 그것을 쓰지 말라니까 공연한 것을 써서 그런다.’고 하였다.(당시 간부들의 증언)
301:2 호병이 침노하리라. 당시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301:3 미국은 한 손가락을 퉁기지 않아도 쉬이 들어가게 되리라. 주한미군 철수과정이 남북 상씨름을 판 막아 가는 매듭과정이다.
歲月汝遊劒戟中이나 往劫忘在十年乎아 (세월아! 너는 전쟁의 겁액 속에서 흘러가는데 그 겁액이 10년 세월에 있음을 잊었느냐!) (道典 5:292:5)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애기씨름'이 끝난 얼마 후 세계는 또 한번의 씨름판을 맞이한다. 바로 일본과 중국이 맞붙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한 중·일전쟁인데 상제님은 이를 '총각씨름 공사'로 집행하셨다. 상제님이 붙여준 천하통일지기와 일월대명지기를 받은 일본은 20세기 전반부를 통하여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중국대륙을 통채로 집어삼키려고 나서는데 그 본격적인 서곡이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이다. 만주사변은 뒤이어 1937년 중일전쟁으로 발전하며 마침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된다. 그런데 상제님은 두 번째 총각씨름을 무한정 오래 끌도록 하지 않으셨다. 즉 10년을 넘지 않고 끝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1937년 시작한 중일전쟁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1945년에 종결된다.
중일전쟁 직전의 중국과 일본의 정세
1930년대 일본은 극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일본을 찾은 것이다.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블럭경제체제의 확보와 나아가 중국대륙으로까지 그 활로를 찾아야 했던 일본은 일찌감치 공황의 탈출 방법으로 ‘전쟁’을 택했다. 마치 임진왜란에서와 같이….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래 중국대륙 침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내전(內戰) 상태였는데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군과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군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만주에서는 장쩌린(張作霖)이 일본의 지원을 업고 세력을 키우며 장제스군과 맞서고 있었다.
만주전쟁(만주사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쩌린은 정부군에 밀려 패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초조해진 일본은 장쩌린을 제거하며 만주를 직접 지배하려고 나섰다. 그런데 장쩌린의 아들 장샤오량(張學良)이 장제스와 손을 잡음으로써 중국은 통일의 물꼬가 트이는 듯했다. 급해진 일본군은 군사행동을 일으킬 명분을 조작하기 위해 류탸오거우(柳條溝)의 만주철도를 폭파시키고 장샤오량의 짓이라 뒤집어 씌웠다. 1931년 9월 18일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이 시작한 만주사변은 중국침략의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32년 초까지 만주 전역의 대부분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괴뢰 만주국을 세워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의를 허수아비 황제로 앉혔다.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자기 영토의 몇 배가 되는 광활한 만주를 차지한 일본은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투자수요가 활짝 열려 세계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고, 정국은 정당내각에 종지부를 찍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였다.
한편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提訴)에 따라 조사단을 파견하고 그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중-일전쟁
1 서양사람에게서 재주를 배워 다시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배은망덕줄에 범하므로
2 이제 판밖에서 남의 의뢰없이 남모르는 법으로 일을 꾸미노라.
3 일본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背師律)에 범하는 것이므로 참혹히 망하리라.(道典 5편 91장)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워 단물을 빨아먹던 일본은 1937년 군부가 정부를 장악한 이후 만주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대륙 전체를 집어삼키고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중국은 국민당군과 공산당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사되어 하나로 뭉쳐지는 듯 하자, 1937년 7월 7일 다급해진 일본군은 베이징 근교에서 야간 돌격훈련을 한다면서 중국군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 루꼬우차오(蘆溝橋) 사건을 빌미로 마침내 중일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베이징, 톈진, 상하이를 날름 집어삼킨 일본은 그 해 12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마저 거머쥐게 된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 병사들은 포로를 상대로 총검술 훈련과 살인시합을 자행하는 등 난징 전체인구의 절반인 30만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난징대학살). 이런 노골적인 침략을 두고 일본 교과서에서는 ‘일본군은 중국에 진출(進出)하여’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남북 10개 성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한 일본은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한 중국측의 항전에 주춤거리면서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어쨌든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한 일본은 1938년 후반 그 유명한 대동아공영권을 천명하며 아시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1939년 유럽의 전쟁은 군국주의 일본에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는데, 그해 봄 독일이 순식간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은 호시탐탐 노려오던 동남아시아에 손길을 뻗친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승산없는 싸움이었던 미국과 한판 전쟁을 치룬 일본은 원자폭탄의 위력 앞에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기에 이른다.이로써 일본은 석권천하의 허황된 꿈을 접어야 했고, 만주사변을 시발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할 때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전쟁은 막이 내렸다. 중일전쟁으로 일본은 중국인 3,500여만명을 살상했고 6,000여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
즉 제2변 총각씨름은 ‘1931.9 만주사변→1937.7 중일전쟁→1941.12 태평양전쟁→1945.8 패망’의 과정을 거쳐 전개된 것이다.
1 하루는 성도들에게 옛 글 한 수를 외워 주시며 “이 글은 세상 비결이니 잘 기억하여 두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2 三人同行七十里요 五老峰前二十一이라
삼인동행칠십리 오로봉전이십일
3 七月七夕三五夜요 冬至寒食百五除라
칠월칠석삼오야 동지한식백오제(道典 5편 308장)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는 8.15 해방을 말한다.
3+5=8, 3*5=15이며 해방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이 음력으로 7월 7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뒤의 구절인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는 앞으로 다가올 개벽을 예시해 주는 암호이다.
중국의 사회주의 국운공사
아라사 군사(러시아)가 내 군사니라. 청국은 아라사 군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노라. (道典 5:300:5∼6)
이 말씀은 오늘날 14억의 인구를 가진 지구상 최대국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신 도수 말씀이다. 상제님은 중국을 사회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권 아래 두심으로써 공산화시키는 공사를 처결하신 것이다.
상제님의 이 말씀에 따라 중국은 청나라의 국운이 막을 내린 이후, 중국천하를 통일하는 대장정(Long March)을 거치면서 인민의 힘을 얻은 마오쩌둥에 의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옛 소련의 원조와 지원을 받는다.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제1차 5개년 계획을 소련식 중공업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소련으로부터 각종 플랜트를 수입하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수립의 가장 주요한 요인은 마오쩌둥이 대장정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통해 장개석이 늘 등한시했던 ‘인민의 힘’을 얻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저력을 바탕으로 단 시일만에 중국 공산당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45년 일본 패전 후 4년만에 힘겨운 상대인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축출할 수 있었다.지난 회에서 1차대전(애기판)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일-영:러-불'의 오선위기로써 비롯되어 국제연맹의 태동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걸 전했다. 이번에는 2차대전(총각판)의 천지공사적 의미를 전한다.
그전에 말하고 싶은 것은 증산 상제님의 9년천지공사(1901~1909)직후부터 근 100여년 동안에 지구행성은 무려 세번의 세계대전, 수차례의 준세계대전과 무수한 국지전을 치루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국을 맞지 않았다는 것은 경이롭다) 지금도 그 여진이 계속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부시가 2002년을 굳이 '전쟁의 해'라고 선포하지 않았더라도 후대의 사가들은 마땅히 이 시대를 전쟁의 세기라고 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