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증산상제님의 생애 본문
증산상제님의 생애
증산상제님의 생애
증산상제님의 생애
개벽의 여명 |
19세기 후반, 세계는 큰 고통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찬란한 문명을 일으켰던 중국과 인도를 비롯하여 동양 여러 나라가 서양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일찍이 없었던 두려움이 온 동양천지를 짓눌렀다.
동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인 조선의 운명 역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당시 조선은 유교 문화를 통치 이념으로 삼던 왕조 국가였다.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관리는 관리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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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상제님의 탄강 |
그무렵 전라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호상(虎相)이며, 음성이 우렁찬 천하장사였다. 그의 성은 진주(晉州) 강(姜)씨이며, 이름은 흥주(興周)였다.
그의 아내의 성은 권(權)씨이며, 이름은 양덕(良德)이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붕어를 잡아오면 고기의 배를 가르기 어려워할 정도로 성품이 선하시며, 천성이 조용하시고 한평생 남의 말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
경오(1870)년 음력 9월 어느날 권씨는 친정에 근친(謹親)하려고 가 계실 때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뒤 깊이 잠들었다. 그 때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음에 온 세상이 광명하여지는 꿈을 꾸었다.
이로부터 성령을 잉태하여, 열석 달만에 증산 상제님을 낳으시니 이 날이 신미년, 단기 4204년, 서기 1871년 음력 9월 19일이다. 이 때 권씨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상제님이 태어나신 후,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온 집을 밝게 둘러싸고 하늘에 통하여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
증산 상제님이 탄강하신 곳은 조선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지금의 전북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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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존휘와 존호 |
상제님의 존휘(尊諱)는 ‘일순(一淳)’이요, 자(字)는 ‘사옥(士玉)’이다. 장성하신 후에는 호(號)를 스스로 ‘증산(甑山)’이라 하시니, 이로써 사람으로 오신 상제님을 온 인류가 ‘증산 상제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존호 ‘증산’은 ‘성숙과 결실’을 뜻하며, ‘상제’란 우주만유를 맡아 다스리는 최고신이며, 주재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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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의 조선 강세 언약을 받으신 진표 율사 |
증산 상제님은 당신이 곧 ‘상제’이며, 동시에 ‘미륵불’로서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셨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道典 2:43)
기독교와 비등한 문명의 축이 동양의 불교다. 불교의 깨달음의 궁극은 바로 미륵불의 도법(道法)이다. 미륵불은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는 희망의 부처요, 구원의 부처다.
동방 조선땅의 미륵 신앙의 대중화는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발원한다.
그는 열두 살 때 부모의 허락을 받고 출가하여,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던 중, 27세 되던 경자(庚子, 760)년에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했다.
그러나 3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뼈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온몸을 돌로 두드리며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도(道) 받기를 간구했다. 마침내 미륵불께서 그의 지극한 정성에 응감하시어 도통을 내려 주셨다. 그리고 장차 후천개벽기에 미륵불이 이 땅에 강세하실 것을 알려 주시고, 율사에게 미륵불상을 세우게 하셨다.
그리하여 율사는 모악산 금산사에 밑 없는 시루[甑]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미륵불상을 조상(造像)하고, 뒤이어 금강산 발연사, 속리산 법주사를 창건하여, 한평생 미륵의 도를 세상에 전했다.
그로부터 천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하늘과 땅의 때가 무르익으매, 미륵부처이신 상제님이 ‘증산(甑山)’이란 도호를 가지고 동방의 이 땅에 강세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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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상제님의 강세를 예고한 최수운과 김일부 |
상제님이 강세하시기 얼마 전, 조선에서 증산 상제님의 탄강을 예고한 구도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崔水雲, 1824∼1864). 몰락 양반의 서자(庶子)로 태어난 그는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간절한 열망을 품고 구도(求道)에 정진했다.
그는 49일간의 기도 끝에, 1860년 4월 5일, 마침내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법을 주노니 닦고 다듬어 수련하여 글을 지어서 시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그것은 하늘에 계신 상제님의 말씀이었다.
이 때 최제우는 하늘의 상제님으로부터 열석자 주문을 계시받았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 천주님을 모시고 새 세상의 조화를 정하게 되니, 세상 만사를 알게 되는 큰 은혜를 영세토록 잊지 못하옵니다.’그가 인류를 향해 외친 메시지는, 하늘의 상제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새 세상을 연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증산 상제님의 탄강을 예고한 또 다른 구도자가 있다. 그는 조선말의 대철인(大哲人)인 김일부(金一夫, 1826∼1898) 선생이다. 그는 상제님의 강세 소식을 『정역(正易)』에서 이렇게 전했다.
“그 누가 용화낙원의 세월을 이제야 보냈는가.”, “천지의 맑고 밝음이여, 일월의 새 생명 빛나도다. 일월의 새 생명 빛남이여, 낙원세계 되는구나! 개벽세계여, 새 세계여, 상제님께서 성령의 빛을 뿌리며 친히 강세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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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상제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
증산 상제님은 천상의 어좌(御坐)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시게 된 경위를 이렇게 친히 밝혀주셨다.
“이마두(利瑪竇, Matteo Ricci, 1552∼1610)가 천국을 건설하려고 동양에 왔으나 정교(政敎)에 폐단이 많이 쌓여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죽은 뒤에 동방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이마두의 공덕이 천지에 가득하니 천지간에 신명계의 영역을 개방하여 동서양의 신이 서로 자유롭게 넘나들게 한 자가 이마두니라. 선천에는 천지의 신이 각기 제 경역(境域)을 굳게 지켜 서로 왕래하지 못하였으나, 이마두가 이를 개방한 뒤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서 천국의 문명을 본떠 사람들의 지혜를 열어 주었나니, 이것이 오늘의 서양 문명이니라.” (道典 4:11)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에 이마두는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菩薩)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天蓋塔;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眞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道典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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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어린 시절, 천지기운과 하나 되시어 의식이 크게 열림 |
증산 상제님은 어릴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많으시어 여섯 살 때 마당구석에 화초를 심어 아담하게 가꾸시고, 위기에 빠진 생물을 보면 힘써 구하셨다.
여섯살 되시던 때 부친이 신태인 장군리에 있는 훈장 황씨를 불러 천자문을 가르치려 하는데 책을 펴자 “하늘 천, 따 지” 두 글자를 큰 소리로 읽으시더니, 책을 덮어버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훈장이 그 까닭을 묻자 “하늘 천 자에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 따 지 자에 땅의 이치를 알았으니 더 배울 게 무엇이 있겠느냐?”하시고 그 후로 공부를 작파하셨다.
일곱 살 되시던 해인 정축(丁丑: 道紀 7, 1877)년에는 풍물굿(농악)을 보시고 문득 혜각이 열리셨다.
어린 시절부터 영기(靈氣)가 뚝뚝 흐르는 증산을 바라보고,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영아(靈兒)요 신동(神童)이라고 불렀다.
상제님은 어려서부터 집 근처에 있는 시루산에 자주 올라 산을 타고 다니시며, 산하정기를 호흡하시고 산 속의 고요에 젖어 깊은 명상에 들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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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 세상을 주유하시며 깊이 사색하심 |
열 살 넘어서는 가족을 따라 서산리 외갓집에 가서 얼마 동안 사셨다.
하루는 부친이 벼를 말리는데 새와 닭의 무리를 심히 쫓으시니 이를 만류하며 말씀하시기를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시되, 부친이 듣지 않고 굳이 쫓으니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14∼17세에 학업을 중단하시고 사방을 주유하셨다. 이 때 상제님은 3년 동안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도 하시고, 산판에서 나무를 베는 벌목꾼 일도 하시며, 하층 백성의 삶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다.
상제님은 이곳 저곳으로 유랑 생활을 하시다, 얼마 후 집에 돌아오시어 수 년 동안 객망리 시루산 상봉을 주야로 오르내리며 공부하셨다. 시루산에서 공부하실 때 호를 스스로 증산(甑山)이라 하셨다.
젊으셨을 때는 기력이 강장하시어 힘겨루기를 좋아하셨다. 어느 때에는 마당에 서서 발로 처마끝을 차기도 하시고, 한번은 여러 사람과 힘겨루기를 하시는데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 돌리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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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때, 동학혁명을 체험하고 광구천하의 큰 뜻에 세우심 |
스물네 살 되시던 해인 갑오(甲午: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사람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분개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곧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30만 명이 넘는 농민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세상 인심은 날로 악화되고, 관리들은 더욱 포학과 토색을 일삼고, 모든 학(學)과 교(敎)가 참된 덕(德)을 잃어 온갖 폐단을 낳아, 백성은 고난과 궁핍 속에서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여, 불안과 두려움이 온 사회를 엄습했다.
증산께서 천하가 날로 그릇됨을 깊이 근심하시고 이 해에 의연히 광구창생의 큰 뜻을 품으셨다. 이 때부터 천하사에 뜻을 정하시고, 주로 호남 지역을 주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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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때, 천하를 건질 큰 뜻을 이루기 위해 3년간 천하유력의 길을 떠나심 |
27세 되시던 정유(丁酉: 道紀 27, 1897)년에 이르러 광구천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먼저 유·불·선, 음양 참위(讖緯)를 비롯한 모든 글을 읽으시고 “이것이 천하를 광구하는 데 일조(一助)하리라.”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시기 위해 이 해 가을에 드디어 천하 유력의 길을 떠나셨다.
천하를 주유하실 때 맨발로 먼길을 가시고, 풀밭에서 노숙하시고, 인가에서 걸식하시고, 여러날 동안 굶으시고, 들에서 곡식을 거두시고, 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기도 하셨다.
농부를 만나면 대신 밭을 갈아주시고, 시장에 가서 상인들을 도와주시고, 장인과 함께 일을 하시고, 노인을 만나 옛일을 말씀하시고, 관리를 만나 정치를 들으시는 등 만고를 체험하시고 만상을 친히 둘러 보셨다.
증산께서 천하를 주유하실 때, 하루는 어느 개울가를 지나시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셨다. 한 부녀가 배가 고파 개울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 딸이 물새우를 잡아서 아비의 입에 넣어 주니, 그 아비는 다시 꺼내어 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증산께서 그 광경을 애처로이 바라보시며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어서 베풀어서 저런 불쌍한 창생들을 살려야 하리라. 저렇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널리 구하리라.” (道典 1:32)
이렇게 수 년 동안 유력하시며 민심과 풍속을 살피시고 명산대천의 지운과 기령을 관찰하신 후 30세 되시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객망리 본댁 샘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공명첩과 교지를 불사르시며, 만류하는 부모님과 친족들에게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고 선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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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때, 궁극의 도통(道通)을 성취하고 삼계대권을 주재하심 |
31세 되시던 신축(辛丑: 道紀 31, 1901)년에 이르러 ‘이제 천하의 대세가 종전의 알며 행한 모든 법술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비로소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조화권능이 아니고서는 광구천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줄을 깨달으시고 수도(修道)에 더욱 정진하셨다.
그 해 6월 초에 집 근처에 있는 시루산에 오르시어 14일 동안 수도하시고, 6월 16일 다시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願寺) 칠성각으로 가시어 도를 닦으셨다. 이 때에 대원사 주지 박금곡(朴錦谷)이 증산 상제님을 천신(天神)으로 대접하고 공경하며 시봉했다.
증산께서 대원사에서 수도하신 지 스무하루 만인 신축년 음력 7월 7일, 천둥과 지진이 크게 일어나고 상서로운 큰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탐음진치(貪淫瞋癡)를 비롯한 모든 마(魔)를 굴복시키시고 중통인의(中通人義)의 대도통을 하시고 무상의 대도로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여셨다.
상제님이 공부를 마치시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의 온갖 새와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했다. 이를 바라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느냐?” 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였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하시니 수많은 금수들이 그 말씀을 좇았다.
이로부터 증산 상제님은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하시는 인존(人尊) 천주님의 자리에서 우주의 조화권능을 뜻대로 행하기 시작했다.
31세 때, 9년 동안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시고, 39세에 어천하심 |
상제님은 31살 되시던 신축(1901)년부터 39살 되시던 기유(1909)년까지 9년 동안, 선천우주의 상극 질서를 후천우주의 상생 질서로 돌려 놓으시고, 인간계와 신명계에 누적된 모든 원(寃)과 한(恨)을 풀어 후천선경(後天仙境) 문명의 기틀을 짜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셨다.
공사를 행하실 때는 식사나 대소변 기타 어떠한 일로도 중지하심이 없이 반드시 공사를 마치신 뒤에 다른 일을 보셨으며, 공사 보러 다니시다가 배가 고프면 산에 가 열매를 따 잡숫기도 하고, 날이 저물어 잠 잘 데가 없으면 바위 밑이나, 방앗간에서 주무시기도 하셨다.
때로는 옷과 신발을, 없는 사람에게 모두 벗어 주기도 하시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려 주기도 하셨다.
상제님은 천지공사를 행하시며, 후천개벽 때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 넘어가는 것을 도안(道眼)으로 환히 보셨다. 인류가 진멸지경(殄滅之境)에 처했는데도,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눈앞의 이익과 생업에만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는 걸 보시고 “허망하다. 허망하다.”고 탄식하셨다.
하루는 아무리 하여도 세상사람을 모두 건지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셨다.
이렇게 9 년 동안 지상 인간계와 천상 신명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선천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 후천의 새 세상을 여는 천지공사를 행하시고, 기유(己酉: 道紀 39, 1909)년 음력 6월 20일 아침, 성도들에게 천지공사를 마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6월 22일, 공자, 석가, 노자를 부르시어 심판하시고, 23일에는 후천선경을 성사재인(成事在人)시키는 대두목(大頭目) 출세의 예식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박공우 성도를 부르시어, “장차 괴질이 대발(大發)하면 홍수가 넘쳐 흐르듯이 인간 세상을 휩쓸 것이니 천하만방의 억조창생이 살아 남을 자가 없느니라. 그 때 의통(醫統)을 지니고 있으면 어떠한 병도 침범하지 못하리라.”(道典 10:38) 말씀하시고, 은밀히 의통(醫統)을 전하셨다.
이 무렵 상제님은 보름 동안 곡기(穀氣)를 끊으시어 굶주림과 무더위 속에서 선천 상극천지의 모든 깊은 한과 원을 거두어 대속하시어, 세계 창생으로 하여금 영원한 강녕(康寧)을 얻게 하셨다. 또한 어천하실 즈음하여 성도들에게, “너희들이 큰 복을 구하거든 일심(一心)으로 나를 믿고 마음을 잘 닦아 도를 펴는 데 공을 세우고, 오직 의로운 마음으로 두 마음을 두지 말고 덕 닦기에 힘써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몇 차례 깨우쳐 말씀하셨다.
다음 날 점심 때, 상제님은 김형렬 성도의 사랑방에서 김형렬 성도에게 기대신 채 작은 소리로 태을주(太乙呪)를 읽으시다, 오시(午時)가 지나자 수많은 신장(神將)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상 옥경(玉京)으로 어천(御天)하시니, 천둥번개와 지진이 천지를 뒤흔들어 온 대지에 흑암이 깃들었다.
증산 상제님께서 어천하시자 성도들이 모두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치며 통곡하니, 이날은 기유년 신시개천(神市開天) 5807년 단군기원 4242년 조선 순종(純宗) 융희(隆熙) 3년 6월 24일, 서력기원 1909년 8월 9일이요, 수(壽)는 39세였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시고 나자 한참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가 다시 청명하게 개이고, 어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오색의 영롱한 서기가 하늘로 뻗쳐올라 7일 동안 계속되었다.
상제님을 모신 성도(聖徒)들 |
증산 상제님이 9년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김형렬, 김호연, 박공우, 차경석, 백남신, 문공신, 김경학, 신경수, 신경원, 안내성, 황응종 등 약 70여 명의 성도들이 수종들었다. 이들은 각기 상제님으로부터 소임을 부여받아, 후천개벽공사에 지대한 공덕을 쌓았다.
성도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순박한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갑부, 대규모 한약도매상, 육군장교 등도 상제님을 추종했다. 채 열 살도 안된 어린 소녀에서부터 여든 살이 넘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성도들이 상제님을 모셨다. 이들은 천지조화를 뜻대로 쓰시는 상제님의 권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열과 성을 다하여 상제님을 따랐다.
여러 성도들 가운데 상제님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분은 김형렬(金亨烈, 1862∼1932) 성도이다. 그는 상제님이 14세 되시던 해에, 처음 상제님을 뵈었다. 1894년에는 동학혁명에 참가했다가 상제님의 은덕으로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그는 1902년부터 상제님이 어천하시던 1909년까지, 8년 동안 상제님을 지성으로 모시고, 훗날 상제님의 말씀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또 김호연(1897∼1992) 성도라는 특이한 분이 있다. 이 분은 상제님이 공사를 행하기 시작하신 신축(1901)년 당시, 불과 다섯 살 난 어린 소녀였다. 상제님은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이 어린 소녀를 늘 데리고 다니셨다.
그리고 그녀가 아홉 살 때, 125일 동안 수도 공부를 시켜, 신안(神眼)을 열어주셨다. 그후 김호연 성도는 신명(神明)이 오고가는 것은 물론이요, 새와 짐승이 말하는 소리까지 알아들었다.
천지공사 현장에서 우주의 대신명들이 상제님의 천명(天命)을 받드는 것을 목격하고, 신도(神道) 차원의 기적을 수없이 체험했다. 그리하여 천지공사의 이면 세계, 곧 우주 신명계의 대개벽공사는 김호연 성도에 의해 후세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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