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환단고기>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환단고기>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세덕 2014. 3. 18. 19:39

<환단고기>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환단고기>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환단고기『삼성기』 상편을 보면, 배달의 역사에 이어 고조선 단군왕검의 역사가 나온다. 이분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얘기해 주는 것보다 우리 일꾼들이 현장에서 뛰고 활동하면서 꾸준히 환단고기『삼성기』를 읽고, 정보를 분석하고, 하편과 종합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환단고기『삼성기』 상하를 종합해서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어디를 가더라도 환단고기『삼성기』를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조선 이후 나라의 계보가 북부여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실이다.
 
 병진(BCE 425)년 주나라 고왕 때, 그러니까 고조선 제44대 구물 단군 때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다. 여기서부터 국통 맥으로 부여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부여사의 시작은, 실제로는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의 이름인 ‘부여’에서 온 것이다. 단군왕검의 슬하에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부루, 둘째가 부소, 셋째가 부우, 넷째가 부여다. 단군왕검은 막내인 부여를 지금의 하얼빈에서 서남방으로 300리 떨어진 곳의 제후로 임명했다. 바로 이것이 부여사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구려의 제후로 봉했다. 여기서 고구려라는 호칭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셋째 부우는 진번의 제후로 삼았다.
 
 부여의 역사는 그 자체가 수수께끼요, 우리 뿌리 역사의 신비이다. 일본도 부여족이 건너가서 670년에 세운 나라다. 그리고 하나님(상제님)이 1871년에 인간으로 오실 때도, 부여 문화의 계승국인 백제 땅에서 오셨고, 또 불교사에서 미륵불 신앙이 가장 강력한 곳도 바로 이 부여문화의 호남 땅이다.
 
 4,300년 전, 단군왕검의 막내아들 부여로부터 비롯된 이 부여사의 시작을 가을개벽의 완결처, 동북방에서 실현되는 간도수艮度數의 출발점으로 볼 수도 있다.
 
 
 고조선의 국통은 어떻게 계승되는가?


 그러면 고조선의 국통이 어떻게 북부여로 이어지는가?
 
 단군왕검은 삼신문화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삼한 체제는 22대 색불루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이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게 되면서 차츰 삼조선 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 44대 구물 단군 때에, 병권을 막조선과 번조선에 완전히 나눠줌으로써, 삼조선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러다가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그리고 이후 오가의 공화정을 접수하고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