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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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단군조선 혁명과 삼한관경제의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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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일어나다! 22세 색불루단군
신시배달 이래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방 한민족은 삼신상제님을 신앙하는 신교를 바탕으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바탕으로 제세이화, 홍익인간의 도 정치(道政)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무력은 그러한 도와 예에 어긋났을 때에만 부득이 대단군이 통솔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중원에서는 단군조선을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고, 공자도 중원에서 도의 정치가 실행되지 않자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이 건국한 이래 중반기에 접어드는 사이 중원은 요, 순, 우의 하나라를 거쳐 상나라 말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선 역사에서 후대까지 큰 흔적을 남긴 혁명이 발생하였습니다.
단군조선 우현왕 고등
동북아의 천자 나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단군조선은 21세 소태단군 말기 무렵, 개국 이후 첫 번째 국가 위기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삼한관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나라 22대 왕 무정武丁이 영토를 확장하려고 조선의 여러 제후국을 공격하자 개사원蓋斯原 지역의 지방장관(욕살褥薩) 고등高登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토벌하였습니다. 이때 고등은 대군을 장악하고 서북 지방을 경략하면서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공을 세운 고등은 자신을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고, 결국 소태단군이 응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우현왕에 오른 고등이 죽자 손자인 색불루索弗婁가 그 자리를 세습하였습니다.
최초의 쿠데타
21세 소태단군은 순행 길에 옥좌를 이양할 의사를 밝히며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그를 불러 섭정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우현왕 색불루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고 나섰고,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아사달과 인접한 부여夫餘에 새 궁을 짓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소태단군은 어쩔 수 없이 국새를 색불루에게 넘겨주고 아사달에 은거하여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쿠데타였습니다.
이때 단군조선의 번한에 속한 작은 나라인 고죽국孤竹國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우현왕 색불루가 단군의 자리를 무력으로 빼앗은 것이므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갔습니다. 이를 두고 중국 문헌들은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하는데 이는 명백한 왜곡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후 주나라에 갔는데, 주나라 역시 무력으로 상(은)나라를 침공하자 산시성에 있는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색불루가 단군의 지위에 오르면서 서인으로 폐해진 서우여는 마한, 번한의 군대와 연합하여 강력히 저항하면서 삼한의 군대가 서로 맞서 싸우는 내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색불루단군은 서우여를 달래어 번한番韓의 왕으로 임명함으로써 내전은 가까스로 종결되었지만, 삼한관경제는 서서히 붕괴되어 갔습니다.
천도와 삼조선 체제
정권을 탈취한 22세 색불루단군은 길림성 장춘에 있던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단군조선의 제2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정 쇄신을 위해서 기존의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 체제를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서우여를 번조선의 왕으로, 심복 여원흥黎元興을 막조선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 삼조선 체제에서도 진조선의 단군이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색불루 단군의 서고문誓告文
기원전 1285년 병신년 정월에 색불루단군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였고, 음력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을 맞이하여 몸과 마음을 재계하며 천제 지낼 장소를 청소하고, 희생犧牲과 폐백幣帛을 깨끗하게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영절은 일찍부터 이 땅의 영걸들이 강화도 마리산에 올라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낸, 우리가 반드시 회복하여 계승 발전시켜야 할 위대한 문화유산입니다. 이때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어, 삼한의 대백두산 천단에서 제사를 봉행하게 하였습니다. 단군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모셨습니다. 이때 백두산 서고문誓告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자 단군 색불루는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려 절하나이다.
천자의 수신修身이 백성에게 미침은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늘에 제사 지냄에서 비롯하나, 황상皇上(시조 단군)께서 삼신의 밝으신 천명을 받아 보은대덕으로 이미 삼한의 5만 리 강토와 더불어 다 함께 ‘홍익인간’의 큰 뜻을 누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한 여원흥을 보내 삼신일체 상제님의 제단에 제사를 올립니다. 상제님의 성신은 밝고 밝으시어 만유에 그 은혜를 베푸심이 빠뜨림이 없으십니다. 이에 심신을 깨끗이 재계하고 정성스럽게 제물을 바치오니 강림하여 흠향하시고 말없이 도우시어 반드시 새로 보위에 오른 임금의 건극建極을 보살펴 주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왕업을 천만 년 무궁토록 보존케 하옵시고, 매년 풍년이 들어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번영하게 하여 우리 성제聖帝(시조 단군)께서 품으셨던, #나를 비우고 만물을 살리는(空我存物)# 지극한 생각을 밝혀 주옵소서.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8조 금법
색불루단군은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8조 금법을 제정하였습니다. 8조 금법은 여덟 가지 죄와 그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 최초의 성문법입니다. 흔히 알려진 단군조선 시대의 금법禁法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법과 같은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시 단군조선은 신교 문화의 성소聖所인 소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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