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단군조선>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단군조선>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세덕 2023. 8. 22. 20:13

<단군조선>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단군조선>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아, 슬프구나! 부여에 부여의 도가 없어진 후에 한나라 사람이 부여에 쳐들어왔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만약 그 당시에 미리 제정되어, 부여에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은 한나라로 쫓겨 가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골인은 몽골로 쫓겨 갔을 것이다.

신시에 나라를 연[神市開天] 이후로 국통이 있어, 나라는 이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이 국통으로 인해 흥하였나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서序」)

단군조선 제3왕조 시대

우화충의 난을 진압하다
43세 물리단군 말엽에 우화충于和沖이 사냥꾼들을 모아 큰 반란을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물리단군은 붕어하였고, 백민성白民城 욕살인 구물이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진압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외 다른 지역에서도 군사를 보내 힘을 보탰습니다. 지금의 압록강과 요하 지역의 18성이 모두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습니다. 기원전 425년 3월에 홍수로 도성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우화충 무리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에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였으며, 드디어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였습니다.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다

이후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은 구물은 대영절大迎節인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반란으로 폐허가 된 도성을 떠나 요령성 개원에 있는 장당경 아사달로 천도하니 단군조선 제3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구물단군은 국력 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말에서 부여는 ‘아침에 어둠이 걷히면서 먼동이 부옇게 밝아 오는 것’을 뜻합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에 따르면, 초대 단군왕검이 부루태자 이외의 왕자인 부소와 부우 그리고 넷째 아들 부여를 서쪽 땅에 봉했는데, 구려句麗, 진번眞番, 부여 등이 그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제3왕조를 연 구물단군이 초대 단군 시절의 부여를 취하여 국호를 정한 데에는 단군조선 초기의 국력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국가 재건과 중흥의 의지 표명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단군의 수명 1,908세에는 대부여를 제외한 1세 단군에서 43세 단군까지의 역년 1908년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